학부 시절, 친구 하나가 자신은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꿈을 꾼다는 그 친구는, 그래서 꿈을 꾸고 난 다음 날이면 뭔가 찜찜해 보이는 얼굴로 학교에 오곤 했다.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왜 그렇게 ‘찜찜한 기분’을 만들어내는지, 늘 꿈을 꾸며 자는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많은 꿈을 꾸는 이유가, ‘아마도 네 상상과 공상, 자유 연상의 양을 의식만으로 다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던 친구다.
난 꿈을 많이 꾼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자면서 꿈을 꾸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을 뿐더러, 한 편(?)으로 끝나지 않는 날도 많다. 늘 나는 어떤 꿈의 잔상을 가지고 잠에서 깬다. 많은 꿈을 꾸다 보니 소재도 주제(?)도 배경도 참으로 방대하다.
내가 꾸는 꿈의 양에 비하면, 그리고 가끔 어떤 꿈을 해석하고 생각하기 위해 내가 들이는 시간에 비하면 꿈이 대화의 소재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프로이트식 해석법에 100%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꿈들은 분명히 그 해석법으로 명쾌히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동시에 여러 해석법 가운데 프로이트식 방식이 가장 ‘과학적’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신봉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식 해석법을 공부해본 사람이 주위에 의외로 많다는 것이고, 프로이트의 신봉자가 끼어있을 수도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법 불쾌한 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주 가깝다고 믿는 사람 외에는 내 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한국식 해석법이나, 대략적인 프로이트식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는 꿈만 아주 가끔 우스갯소리처럼 던질 뿐이다.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여러 주장들 가운데 정말 탁월하다고 느꼈던 것은 꿈의 기능들 가운데 잠을 유지하기 위한 것과, 꿈에 대한 자기 검열에 관한 이야기였다. 꿈을 많이 꾸다 보니 그 안에서 나 자신에 관해 ‘건질 것’이 많지 않을까 했던 게 프로이트를 접하게 됐던 최초의 이유였는데, 내 꿈들 자체를 기록하고 해석할 때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거의 반사적으로 수반되는 왜곡(그 경계를 확실히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리고 왜곡하고 싶어하는 내 바람에서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더 많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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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한 연구는 사실 프로이트가 최초도 아니고, 프로이트가 집대성하여 ‘완성’한 것도 아니다. 난 모든 꿈이 프로이트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상징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럽 문명의 개념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뿐더러, 어떤 꿈들은 정말 단순히 불수의근들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경계가 모호한 꿈들이 있다. 꿈의 내용 자체가 내게는 제법 ‘불편한’ 내용들인데 그것들이 프로이트식으로 해석되면 더더욱 심기가 불편해지는 꿈들. 그리고 동시에 꿈 자체가 일관성이 없이 (내 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제법 탄탄한(!!) 구성을 동반하는 드라마성이다.) 뒤죽박죽인 경우다. 이런 꿈들을 꾸고 난 뒤, 그것이 또렷이 기억날 때면, 이 불편함과 거부감이 프로이트가 말한 검열의 기작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꿈 자체가 단순히 자는 동안 뇌를 포함한 신체 기관들이 행하는 여러 기능의 부차적인 파생물이기를 바라게 된다.
어떤 경로로 인해 꿈이 만들어지건 간에, 또 프로이트의 해석법이 얼마나 옳고 그른지 간에, 내게 있어 더 의미가 있는 건 꿈의 잔상이다. 어떤 꿈을 꾸더라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그 꿈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이고, 그 느낌들은 잠에서 깨는 순간에는 제법 강한 정도로, 흐릿한 의식과 꿈의 세계 경계에 걸쳐 있게 된다. 이런 잔상이 격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잔잔한 어떤 유쾌한 것인 경우에는 그 하루,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잔잔한 행복감’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이런 종류의 잔상이 내 ‘공상’의 1/4 정도는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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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어떤 일 중에는 현재에 그것을 회상하기만 해도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 또한 과거에는 즐겁지 않은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무덤덤해진 일도 있고, 과거에는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가 매우 약해서 그 자체로 그냥 과거에 묻혀버린 일들도 있다.
난 뭔가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일’이 있다고 느낄 때, 그것을 기억하는 한은 그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언제고 간에 반드시 ‘제대로’ 정돈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 특성이 있다. 그 일이 의식에서도 작지 않은 일로 기억될 때에는 ‘의식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니 어렵지 않게 해결되는 편이지만, 그 정도가 약해서 과거에 묻혀버린 일인 경우에는 종종 꿈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오늘 꾼 꿈이 그러한 경우인데, 이 일의 배경은 7-8년쯤 전이다. 그때 나는 어떤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개인적인 몇 가지 이유로 그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잠재적으로 그 모임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그 사람과 그리 매끄러운 관계를 맺지는 못했었다. 모임의 다른 핵심 멤버들이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그 사람에 대한 내 개인적인 호감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게 어쩌면 가장 큰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 변명거리도 있다. 그 사람은 그 모임의 완전한 내부인이나 소속인이 아닌, 일종의 ‘가깝게 동감-동참하는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그 때의 나로서는 어느 정도 이상으로 경계심을 푼다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이런 종류의 방어용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 그 무렵의 내가 해야 했던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간에, 그 사람과 나는 얼굴은 매우 잘 알고, 만나면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했다. 친근감은 안면을 튼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정도에서 한치도 더 발전(?)하지 않았고, 아주 쉽게 특정 공격에 노출되곤 했던 그때의 나로서는 딱 그 정도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몇 년 뒤, 그때를 생각하면 난 그런 식으로 내 벽 너머에 두었던 몇몇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식의 흔한 가정.
그때의 날갯짓이 폭풍을 만들어내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내가 인간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변화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후로도 간간히 해 왔었다. 의식상으로는 그리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기억인지라 그걸 직접 생각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늘 꿈은 그러했던 사람과 나름 ‘연인 관계’에 놓인 내용이었는데, 꿈속에서는 ‘연애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은 없고 그저 그 관계 자체가 아주 오래된 것인양 자연스럽게 유지되고 있는 내용이었다. 꿈 속의 느낌과 잔상이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따뜻함’이라 잠에서 깨면서도 상당히 기분이 좋았는데, 재미있는 건 꿈에서 내가 가졌던 주된 생각 –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과 ‘그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느껴지는 즐거움-이 그 꿈 속에서 내게 만족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가 유학을 가면서 완전히 단절된 그 사람과의 관계가 복원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복원은 커녕, 그 사람을 마주칠 일조차 다시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 꿈속에서 난 그 무렵에 맺고 있던 관계들에 대한 내 오랜 작은 아쉬움을 (심리적으로, 그리고 다소 틀어진 방향으로) 해결했고, 만일 이런 과정 전체가 뇌의 ‘의도적’ 행동(?)이라면, 이건 정말 경탄할 만한 ‘生’의 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