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만나지 않았던 후배다.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만남은 서너번 뿐이니 거의 만난 적 없는 후배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C는 고등학교 써클 후배다. 써클은 인원수가 적기도 했거니와, 그 특유의 분위기 안에서 참 많은 일을 만들어내곤 했다. 더러는 써클에 직접 몸담고 일을 하던 학교때보다도 오히려 졸업 후에 서로 가까워지기도 했고, 이제는 띠동갑도 넘어선 후배들에게서도 무슨 행사때마다 연락이 온다. 그 끈끈한 고리가 어떨 때는 '지긋지긋함'으로 다가올 때도 있고 하여, 오히려 그 써클 '소속'이 아니었던 대학 중반에 거기서 '탈퇴하겠다'는 말까지 했던....그런..뭐라고 규정하기 힘든 어떤 모임.
한국을 떠나있는 몇년간 내 많은 고리들이 끊어지거나 엷어졌다. 삶의 공간이 바뀔때마다 겪어야 하는 일. 끊어진 고리 가운데 절반은 자의였고, 절반은 정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디에 속하는 걸 지독히도 싫어했다. 어떤 이름으로 함께 묶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줍잖게 표현되는 친밀감들이 부담스러웠다. 어디에 함께 속한다는 건 분명 작지 않은 동질감을 줄 수 있지만, 직접적인 관계에선 그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경험상에서는. 난 모든 사람을 개인으로 만나고 싶었다.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고리는, 그 사람과 내가 얼마나 많은 마음과 시간을 서로를 향해 썼는지에 좌우될 뿐, 어디에 함께 속한다는 동일 소속감은 일차적인 낯가림을 흐릿하게 해주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가 아니었다.
다만 그 써클의 경우에는 다소 예외인 것이.. 이 사람들은 결코 자주 만나지 않았다. '써클'의 이름으로 적게는 대여섯명, 많게는 수십명이 모이는 만남은 많아봐야 일년에 두세차례정도, 그나마도 한번 정도 나갈까 말까 하고, 대부분은 그중에 제법 가까운 사람들이 두엇 모였다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즉석에서 모임이 커지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이들에게는 언제나 일종의 믿음과 마음이 가고, 그래서 처음 보는 후배에게도 가식적이지 않은 따뜻함으로 대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C가 우리집으로 행사 연락을 해 온 건 몇해전 밤, 집에 일이 있어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날이었다. 막 잠이 드셨다 전화에 깬 부모님은 다소 짜증을 내셨고, 참 미안하게도 난 이름도 그날 처음 들은 후배에게 화를 냈다. 며칠 후 C가 연락해준 그 자리에 나가 C를 처음 본 나는 그날의 일에 대해 사과를 했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뒤로 난 C를 세번 정도 더 본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느 겨울 밤에 있었던 모임에서 C가 자신의 최근 고민거리에 대해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던 일이다. 고민의 내용은 대학 초년생의 '일반적인' 고민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C의 고민은 마음에 많이 와닿았고, 나도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한에서 C가 얻고 싶어했던 대답들을 해주었다. 그뒤로 남은 것은 C가 속깊고 마음이 따뜻한 후배라는 기억.
어제밤 자정 무렵,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C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현재 의식불명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다는 소식. 그리고...전혀 가망이 없어 수일내에 호흡기를 떼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 조만간에 다른 '소식'이 올 것 같으니, 그날은 모두 찾아와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
수영장 탈의실에서 발을 다쳤다. 피가 멈추질 않아 평소보다 늦게 수영장을 나와 걸어오는데 발톱 하나 부러진 것의 통증이 상당했다. '아프다'고 생각하며 걷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C의 고민을 들으며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닌 좋은 시간을 나보다 더 많이 가질 것'이라며 위로(?)를 해줬던 일이 생각났다. 25살의 C는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인데....31살의 나는 발톱 하나 부러졌다고 아파서 울고 있다.
* 어떤 정언 혹은 법칙, 그리고 다양성의 인정이 서로 부딪힐 때가 많다. 일종의 범위 설정 문제일수도 있으나, 범위 설정이 달라진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까지 사라지거나 달라지지는 않는다.
'한국인은 이러이러하다'는 말은 한국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정보를 줄 수는 있지만, '모든' 한국인이 그러하냐는 질문을 수반할 수 있다. 가끔은 그 '모든' 대신에 '몇 퍼센트'라는 크기를 정해줄 수도 있지만, 그 '가끔'보다 더 많은 경우에 있어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예를 들어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한국인은 예의가 바르다'고 바꾸어 말했을 때 과연 몇 퍼센트의 한국인이 '예의가 바르다'는 범주안에 포함될 수 있는지, 나아가 '예의가 바르다'는 설정 자체, 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한층 더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예의'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충분히 설정되고 전제되었다 하더라도, 또한 '한국인'이라는 집단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모든 이'에게 '언제나' 예의바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해서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대략 40% 정도의 확률로 예의바른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제한 조건, 경계 설정이 적합한 것일까. 아니 그런 설정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이럴때 참 편리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 '유사성'이다. 같은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것'. 따라서 조금 다른 점 정도는 너그러이 봐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모든'이라는 말은 생략되었거나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리고 말하는 이는 '유사성'을 근거로 하고 있더라도 듣는 이는 그것을 '모든'이 내포된 것으로, '동질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수의 편견과 선입견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론이라는 것은 곧 '설명'이고, '해석'이다. 중요한 개념은 유사성, 규칙성, 연속성 등이 될터인데, 이런 개념들을 근거로 한 '이론화'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빠지지 않을 '확률'이라는 건 불행히도 그리 높지가 않아 보인다. 결국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 며칠전 은사님과 이야기를 하다 내 글이 길다는 평(?)을 받았다. 보편성 추론, 이론화, 일반화를 너.무. 경계하고 염려한 나머지, 말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100% 동의.
더불어, 가끔은 과감하게, 무모할 정도로 이론을 세우고 주장한 뒤, 반론을 대비해 보완해가는 과정을 거치고, 또 반론에 대한 반론이 여의치 않고 오히려 설득당해버렸을 때는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내던져버릴 수 있는 것도 필요한데(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장과정인데), 나에겐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는 완벽주의자스런(실제로 얼마나 그러하냐는 차치하고) 내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여러 특수성을 잡아내고 거기서 색다른 보편성을 유추해보는 일은 제법 하는 것 같은데, 그걸 가다듬는 과정에서 보편성이 깨어질 걸 염려한 나머지 너무 특수성에만 매달린다는 평가. 그리고 과정으로서도 결과로서도, 결국은 자신이 세운 보편성을 스스로 깨버리고 백지로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것도 늘 이런 패턴이다. 나름의 어떤 '주장'(일반화)이 떠올라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면, 끝없이 '예외'들이 등장하거나 생각난다. 더러는 이런 특수성들을 '예외'로 밀어버리거나, 아니면 학생다운 '객기'로 무시해버리는 결단성도 있어야 할텐데, 이게 없다보니 좀처럼 예외들을 놓치 못한다. 그래서 글은 자꾸만 삼천포로 빠져나가고, 나중에는 최초의 주장(나름의 이론?)을 스스로 지워버리고 글쓰기를 포기해버린다.
간만에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전공관련글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마저 같은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선생님은 간파하셨다. 몇년째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나를 참 많이 질책하신 분인데, 이제는 이런 식으로 하려면 공부를 접어버리고, (지적) 호기심 많은 '그냥' 독서가로 남으라는 극단의 꾸지람까지 더하신다.
울고 싶다. 당분간은 이론의 내용보다, 사람들이 이론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더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 나는 '배우'를 존경한다. '연기'라는 일,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 이것이 그들에게는 삶이고 곧 직업이기에 난 그들을 존경한다. 물론 이 '존경'은 '자칭 배우'들을 향하지는 않는다.
'연극하다' '연기하다'라는 말이 가진 두번째 의미, 어떤 부정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그 두번째 의미야말로, 넘쳐나는 '자칭 배우'들에게 딱 적합한 단어.
* 멋진 배우들의 연기를 나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세워, 차가운 연기와 뜨거운 연기로 나눈다. 둘 다 극을 보는 동안에는 배우가 사라지고, 그 인물만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뜨거운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 있어 인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배우가 자신을 지우고(!) 그 인물이 되기 위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확실한 안내가 된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는 완전히 그 인물 자신이며, 따라서 그가 발산하는 모든 감정과 사고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반면 차가운 연기를 하는 배우는 배우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가식적이라거나, 거짓스러운 연기를 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이 두 스타일의 차이는 연기방식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뜨거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인물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켜 그를 토대로 연기를 해나가기 때문에, 감정은 어떤 상황 하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차가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어 인물이나 상황의 도움없이도 그 감정을 자신의 안에서 만들어낼 수가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인물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척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고, 배우 자신에게 있었던 유사 경험을 떠올리며 '느낌'을 '되살리는 것'과도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전자의 배우들이 어떤 연기를 하고 난 직후에 그 인물로부터 벗어나는 데 시간이 다소 걸리는 것에 반해, 후자의 배우들은 돌아서자마자 웃을 수 있거나, 혹은 침 한번 꿀꺽 삼킬 정도의 시간 동안 그 모든 격앙된 감정을 싹 지워버릴 수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스타일, 즉 내 언어로는 '차가운 연기'를 하는 스타일의 배우를 좋아하는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배우 중에는 그런 배우를 본 적이 없다. 그런 가능성이 보였던 배우가 더러 있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지만, 대부분 '뜨거운 연기'쪽으로 가거나, 심한 경우 매너리즘에 빠져 배우의 색만 짙어져버리곤 했다.
'차가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보면 섬뜩함에 가까운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브레히트의 이론이 생각나기도 한다. 간간히 그런 배우들이 관객을 향해 '자, 어때? 내가 그 사람인줄 알았지?'라며 거만하게 웃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해야 하나. 그들의 연기 방식이, 내가 볼때에는 인간의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것(어떤 감정, 더러는 격앙된 감정이면서 상반될 수 있는 감정 사이를 간격없이 오갈 수 있고, 또 그같은 일을 스스로 정확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으로 보이기 때문에, 난 이런 '우롱'이 있다 할지라도 그마저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무섭고 섬뜩한, 그래서 멋진 배우들.
*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난 주저하지 않고, 게리 올드만과 케빈 스페이시를 꼽는다. 두 사람 모두 이런 내 기준에서는 전형적인 '차가운 연기'의 배우들이다. 간혹 '어떤 극에서의 어떤 역'이라는 조건을 달면서 다른 배우들을 내 선호 리스트에 넣기도 하고, 또 '뜨거운 연기'를 하는 멋진 배우들도 있긴 하지만, 배우 자체에 거의 절대적인 찬사를 보내게 되는 건 이 두 사람뿐이다.
* 간만에 게리 올드만의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왜 그 많은 작품 중에 하필 제5원소가 떠오르는 걸까.
혹시...내가 지금 보고 싶은 게 올드만의 연기가 아닌 요보비치의 매력???????????
* '광적'이라는 말을 붙일 만큼 몰입하는, 혹은 좋아했던 국내 연예인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짧게 짧게 좋아했던 연예인들이 있다. 또 좋아한다고 말하긴 좀 뭣해도, 나오는 걸 보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 연예인도 있다. 이 중 하나가 박진영.
그 외모에서 풍기는 일종의 '고집스러움'이 좋았고, 그를 보면 뭐랄까.... 열심히 산다는 말이 생각난다. 성실함이랄까. 거기에 더해 학교 축제때 본 '엘리베이터 안에서' 비방송 버전의 적극성도 눈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한 인터뷰.
지나가다 본 무슨 토크쇼같은 프로그램이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는 아마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가 젊은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을 때였다. 누군들 우리나라 입시 제도에 불만을 품지 않았을까. 전설처럼 3당 4락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고, 비록 제도는 수능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교실의 선생님들은 여전히 암기식 가르침에서 단 한걸음도 나서지 못했을 그 때. 아침 6시에 집에서 나가 새벽 2시가 되어야 내 침대에서 잠들 수 있었던 때. (지금도 그 본질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듯하지만, 주위에 고등학생이 없으므로 그저 추측일뿐)
그래서 교실 이데아의 가사는 그냥, 말 그대로 그냥 시원했다. 기억이 맞다면 이 노래는 내가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처음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그 '입시 지옥'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그냥 후련했다.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는 그 가사를, 조기 유학을 가겠다고 한번, 고고학과를 가겠다고 한번 집을 뒤집어놓은 일 외에는 달리 표출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소심함에 대한 일종의 카타르시스였을까.
잠시 삼천포로 빠지자면, 내가 말하는 '입시 지옥'에는 고등학교 전 과정이 들어간다. 난 오히려 고3을 즐겼다. 다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절대 '아니오'지만, 내 고등학교 생활이 그리 평탄하지가 못했기 때문에, 난 1년만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고3 한 해를 보냈다.
다시 돌아와서, 교실 이데아가 그렇게 온 동네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되어있던 때에, 어떤 토크쇼에서 진행자가 박진영에게 물었다. 교실 이데아의 아류 노래들, 학교 교육에 대해, 거기서 짓눌리는 학생들에 대해, 거창하게 말하면 뭔가 '사회적'인 노래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이 때에 당신은 그런 노래를 하지 않고 사랑 노래만 하는 이유가 뭐냐는 참 웃긴 질문이었는데, 그 때 박진영의 대답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누구나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있고, 답답해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그런 답답함을 노래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노래는 사랑보다 연애에 대한 노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항상 겪는 것, 항상 겪는 감정. 하지만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 무엇보다도 난 이걸 노래하고 싶다. 이게 좀더 삶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배우를 볼 때도 무조건 연기부터, 가수를 볼 때도 무조건 노래부터 보는 내가(외모만 멋진 사람은 모델을, 춤만 잘추는 사람은 댄서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실 노래 실력에 있어서는 절대 좋은 평을 해줄 수 없는 박진영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건 이때였다. 그 이야기를 할때 그가 지었던 표정, 단호하면서도 솔직한, 정색을 하면서도 동시에 또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던 그 표정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 눈에 힘 한번 주면 '눈빛 연기' 운운, 항상 맡아오던 역할과 조금 다른 걸 맡기만 하면 '연기 변신' 운운, 질에 관계없이 드라마에도 나오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그러다보면 광고도 찍고), 토크쇼, 오락 프로그램 여기저기 등장하면 '만능 연예인' 운운, '수험생 여러분 힘내세요' 한마디 하면 사회의식 있는 연예인 운운하는 이 바닥(?)에서, 가끔씩 고집스런 연예인들을 본다.
이들의 고집스러움과 성실함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언론에 자주 노출되지도 않고, 제법 많은 경우에 있어 이런 이들에게는 '거만함'의 딱지가 붙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일까. 거만해도 되는 사람, 거만할 만한 사람이 거만한 것은 멋진 일이다. (이럴 땐 '거만함'보다 '당당함'이라는 단어를 쓰겠지만) 이런 얘기에는 도가 지나치면 보기 싫다는 얘기도 따라붙어야 할테지만, 어차피 그 기준도 모두 주관적인 것. 억지스레 착한 척 눈물 찔끔 흘리고, 억지스레 겸손한 척 고개 숙이는 모습, 정.말.로 착하고, 정.말.로 겸손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척'보다 솔직한 모습이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