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배우'를 존경한다. '연기'라는 일,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 이것이 그들에게는 삶이고 곧 직업이기에 난 그들을 존경한다. 물론 이 '존경'은 '자칭 배우'들을 향하지는 않는다.
'연극하다' '연기하다'라는 말이 가진 두번째 의미, 어떤 부정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그 두번째 의미야말로, 넘쳐나는 '자칭 배우'들에게 딱 적합한 단어.
* 멋진 배우들의 연기를 나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세워, 차가운 연기와 뜨거운 연기로 나눈다. 둘 다 극을 보는 동안에는 배우가 사라지고, 그 인물만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뜨거운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 있어 인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배우가 자신을 지우고(!) 그 인물이 되기 위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확실한 안내가 된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는 완전히 그 인물 자신이며, 따라서 그가 발산하는 모든 감정과 사고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반면 차가운 연기를 하는 배우는 배우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가식적이라거나, 거짓스러운 연기를 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이 두 스타일의 차이는 연기방식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뜨거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인물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켜 그를 토대로 연기를 해나가기 때문에, 감정은 어떤 상황 하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차가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어 인물이나 상황의 도움없이도 그 감정을 자신의 안에서 만들어낼 수가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인물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척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고, 배우 자신에게 있었던 유사 경험을 떠올리며 '느낌'을 '되살리는 것'과도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전자의 배우들이 어떤 연기를 하고 난 직후에 그 인물로부터 벗어나는 데 시간이 다소 걸리는 것에 반해, 후자의 배우들은 돌아서자마자 웃을 수 있거나, 혹은 침 한번 꿀꺽 삼킬 정도의 시간 동안 그 모든 격앙된 감정을 싹 지워버릴 수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스타일, 즉 내 언어로는 '차가운 연기'를 하는 스타일의 배우를 좋아하는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배우 중에는 그런 배우를 본 적이 없다. 그런 가능성이 보였던 배우가 더러 있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지만, 대부분 '뜨거운 연기'쪽으로 가거나, 심한 경우 매너리즘에 빠져 배우의 색만 짙어져버리곤 했다.
'차가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보면 섬뜩함에 가까운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브레히트의 이론이 생각나기도 한다. 간간히 그런 배우들이 관객을 향해 '자, 어때? 내가 그 사람인줄 알았지?'라며 거만하게 웃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해야 하나. 그들의 연기 방식이, 내가 볼때에는 인간의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것(어떤 감정, 더러는 격앙된 감정이면서 상반될 수 있는 감정 사이를 간격없이 오갈 수 있고, 또 그같은 일을 스스로 정확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으로 보이기 때문에, 난 이런 '우롱'이 있다 할지라도 그마저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무섭고 섬뜩한, 그래서 멋진 배우들.
*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난 주저하지 않고, 게리 올드만과 케빈 스페이시를 꼽는다. 두 사람 모두 이런 내 기준에서는 전형적인 '차가운 연기'의 배우들이다. 간혹 '어떤 극에서의 어떤 역'이라는 조건을 달면서 다른 배우들을 내 선호 리스트에 넣기도 하고, 또 '뜨거운 연기'를 하는 멋진 배우들도 있긴 하지만, 배우 자체에 거의 절대적인 찬사를 보내게 되는 건 이 두 사람뿐이다.
* 간만에 게리 올드만의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왜 그 많은 작품 중에 하필 제5원소가 떠오르는 걸까.
혹시...내가 지금 보고 싶은 게 올드만의 연기가 아닌 요보비치의 매력???????????